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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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3월 24일의 소개글쓴다 2020. 6. 6. 02:46
나는 삶은 계란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삶은 계란이어야만 할 때, 그걸 안 먹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막상 우물우물 하다보면 그다지 나쁘지 않다는 걸 알게 된다. 그러나 소금과 사이다는 필요하다. 내가 이렇게 말하면 누군가는 "어린애냐"라고 비웃을 것이다. 그럼 나는 말할 것이다. "어른이 되면 더 맛있냐" 하지만 이런 대답은 한참 생각을 해야 나오기 때문에, 아마 그 자리에서 나는 맞받아칠 수 없을 것이다. 단지 웃고, 흔쾌히 그 사람에게도 소금과 사이다를 건네주는 사람이 된다면 그걸로도 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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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4월 4일쓴다 2020. 6. 6. 02:45
감기가 심해져서 종일 방에 있었다. 나는 하루가 길다고 생각해 본 적이 별로 없다. 훈련소에서 귀향이 확정되고 혼자 생활관에 남아 있었을 때도 심심하다는 생각은 거의 안 들었다. 흐트러진 모습을 보여주기 싫어서 침대에 눕지도 않았었는데, 그때도 시간은 잘 갔던 것 같다. 못 보낸 편지를 쓰고, 앞으로의 계획도 좀 생각하고, 하얀 회벽에 비친 햇빛의 색깔이 변하는 걸 물끄러미 바라보며 시간을 보냈다. 스물 네 살 때의 일이다. 나이를 먹으면 시간이 곱으로 간다고 엄마가 말했다. 스물 여덟이 되었고 덧붙여진 사 년의 세월은 나를 세차게 두드린다. 어둠이 깔리고 아이들이 사라진 놀이터에서 여전히 서성이는 한 아이처럼, 나는 시간의 자락을 붙잡고 주저앉은 채 그렇게 서서히 흐르고 있다. 모든 것은 변한다. 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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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0월 26일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3-쓴다 2020. 6. 6. 02:39
지금 살고 있는 현실이 어딘가 나사가 풀려있는 것처럼 느껴질 때, 바로 그때가 옛일을 더듬게 되는 순간입니다. 그런데 그 비루한 현실이 또 지나고나면 다시 돌아가고 싶은 추억의 대상이 된다는 점은 언제나 아이러니합니다. 제가 최근 열심히 챙겨본 몇 안되는 프로에서 나온 얘깁니다. 윤여정 씨에게 작가가 "젊은 시절로 돌아가고 싶냐"고 묻자 그녀가 그러더군요. "천만에, 절대 안 돌아가고 싶어요. 난 그때 너무 힘들게 살아서 다시 돌아가면 그렇게 못 살 거에요." 저는 그 말이 굉장히 의외였습니다. 나이 든 사람이라면 당연히 젊음을 그리워할 거라 생각했던 것이죠. 스물보다 서른에 훨씬 가까워져 있는 지금, 저는 인생의 클라이막스가 이미 나를 스쳐갔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순간 새로운 글을 쓰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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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3.10. 어느 여행의 기록 (0)쓴다/여행 기록 2020. 6. 6. 02:36
신제주 날이 춥다. 문구점을 찾으러 시내를 헤매고 다녔다. 결국 찾지는 못했지만 시내에 머문 덕분에 스타벅스 바닐라 티가 나한테 맞는다는 것도 알았고, 제주에서 유명하다는 올래국수도 먹었다. 여행은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예상치 못했던 새로운 즐거움을 안겨준다. 이를 느낄 때면 삶에 대한 자신감도 커진다. 삶이 내가 기대한 대로 흘러가지 않더라도 그러지 않았다면 만나지 못했을 기쁨과 즐거움 또한 존재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 내가 이렇게 생각하는 걸 보면, 나는 '인생을 잘 살아야 한다' '지금 최선의 결정을 내려야 한다'는 종류의 강박을 자주 느끼는 것 같다. '잘'이나 '최선'은 여기서 무엇일까? 남들이 그럴 듯하다고 인정하는 것일까? * 하지만 나는 그렇게 살아오지 않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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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3.11. 어느 여행의 기록 (1)쓴다/여행 기록 2020. 6. 6. 02:36
내도동(1) 제주에 도착한 것은 3일째인데 일기를 쓰는 것은 처음이다. 그동안 일기 쓰는 것을 차일피일 미뤘다. 글 쓰는 것은 되도록 미루고 싶은 어색하고 꺼려지는 일이다. 한 번 쓰기 시작하면 멈출 수 없을 것 같고, 어느 정도 양을 채우고 완성된 내용이 나오기 전에는 중간에 빠져나올 수 없을 것 같은 느낌이 글쓰기를 꺼리게 만든다. 하지만 글쓰기는 그런 것이 아니라는 걸 방금 한 문단을 쓰면서 생각했다. 먼저 짧은 분량을 쓰더라도 개의치 않아야 한다. 글을 가장 부담없이 쓰기 위해서는 한 줄만 쓰자는 심정으로 펜을 들어야 한다. 둘째, 가장 쓰고싶은 말부터 써야한다. 말을 꺼내는 데 힘을 쏟다가 해야할 말을 충분히 못하면 그 다음부터 글쓰기는 수고롭기만 하고 별로 보람은 없는 것처럼 느껴질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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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3.15. 어느 여행의 기록 (3)쓴다/여행 기록 2020. 6. 6. 02:34
내도동(3) 엊그제 밤에 배가 아파서 3일만에 일기를 쓴다. 매일 하기로 마음 먹은 것이 있더라도 여하의 이유로 못하는 날이 있을 수 있는데, 아주 짧은 분량을 쓰더라도 연속으로 사흘을 공치지는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오늘은 몸을 다스리는 것에 대해 생각했다. 첫째, 제주도 와서 가장 잘 잤다. 중간에 깨지도 않고 개운하게 일어났다. 둘쨰, 목욕을 갔다. 아침에 컨디션이 어떤지 (정확히 배 상태가 어떤지) 감을 잡기 힘들었지만 아침을 먹고 목욕하러 갔다. 셋째, 간단하게나마 점심을 죽으로 먹었다. 뭔가 먹는 게 조금 부담스럽게도 느껴졌지만 먹어서 축구장에 갈 수도 있었다. 넷째, 축구장에 가서 춥다고 느끼고 자리를 옮겨 앉았다. 추위를 더 참지 않은 것은 잘한 일이었다. 다섯째, 구운 닭갈비를 먹으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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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3.16. 어느 여행의 기록 (4)쓴다/여행 기록 2020. 6. 6. 02:33
내도동(4) 오늘은 이번에 제주 와서 가장 멀리 가장 오랫동안 걸었다. 4시간 정도 10km, 다 합쳐 하루 대략 13km 정도를 걸었더니 고관절이 뻐근하다. 가방을 짊어지고 다니면 길을 온전히 느끼면서 다닐 수 있을지 상상이 안 간다. 1차 목표였던 광령리사무소에 도착해서 더 갈지 고민했었다. 배도 약간 떱떱하고 가고싶었던 항파두리까지도 너무 멀고 저녁 먹는 시간까지 외도동에 못 맞춰갈 것 같고... 고민하다가 갈 수 있는 데까지 더 가기로 했다. 기분 좋게, 괴롭지 않게 갈 수 있는 데까지. 항파두리에서 외도로 내려가는 버스는 없었지만 근무하시는 아주머니의 차를 얻어타고 편하게 돌아올 수 있었다. 돈이 없지 않은 이상, 여행을 다니며 걱정할 이유는 없다는 것을 다시한번 느꼈다.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